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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땅이야기] 세컨드 하우스, 도시인의 로망|
느티나무님 작성글 전체보기 추천 4 | 조회 3839 | 2018.01.11 09:26 | 신고

세컨드 하우스, 도시인의 로망|

 

 

[건축과 삶](Ⅳ-4) 세컨드 하우스, 도시인의 로망

 

ㆍ유년의 원형 좇아 지은 ‘제2의 집’은 실험이었다

건축가 김승회 서울대 교수가 경기 여주시 강천면에 직접 설계해 지은 세컨드 하우스. 산의 경사지에 옹벽을 쌓아 지은 이 건축물은 면적이 39평에 지나지 않지만 서재, 침실뿐 아니라 작업실, 주방 등 크고 작은 공간이 11개나 돼 세컨드 하우스 못지않게 세컨드 오피스 성격도 갖고 있다. | 김재경 건축사진가

건축가 김승회 서울대 교수가 경기 여주시 강천면에 직접 설계해 지은 세컨드 하우스. 산의 경사지에 옹벽을 쌓아 지은 이 건축물은 면적이 39평에 지나지 않지만 서재, 침실뿐 아니라 작업실, 주방 등 크고 작은 공간이 11개나 돼 세컨드 하우스 못지않게 세컨드 오피스 성격도 갖고 있다. | 김재경 건축사진가

 

현대인들은 도시 탈출을 꿈꾼다. 일상을 벗어나 떠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도시에서의 삶을 포기할 순 없다. 도시에서의 삶을 이어가면서도 필요할 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은신처, 현실에서 벗어나 삶을 바라보며 온전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을까. 현대인들이 세컨드 하우스를 꿈꾸는 것은 소득이 향상되고 여가가 생긴 것 못지않게 도시살이의 팍팍함과 맞닿아 있다.

건축가 김승회 교수(50·서울대 건축학과)의 산골 주택을 찾아가는 길엔 촉촉한 봄비가 내렸다. 경기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 점터골. 김 교수의 집은 세컨드 하우스다. 도시인이 열망하는 집, 최고의 건축가가 직접 설계한 자신의 집이다. 건축가는 이 집을 지으며 어떤 마음을 담았을까?

■ 기억의 원형은 한옥

여주 시내에서 42번 국도를 타고 문막 쪽으로 달리다 부평리로 들어섰다. 잘 정리된 마을길을 지나 점터골로 접어드니 길가 콘크리트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콘크리트벽은 옹벽이었다. 경사를 극복해 마당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시골길에 비해 높은 옹벽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모더니스트의 작품이라 그런 것인가, 인근 집들이 주변 풍경에 녹아든 것과 대비됐다. 옹벽 위, 살짝 열린 대문 너머로 보이는 집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몇 개의 상자 조각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나무 외벽은 담담하면서도 차분했다. 처마를 따라 현관에 다가서니 문이 열려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마루 한쪽에 편백나무로 만든 욕조가 보였다. 현관에서 보이는 곳에 위치한 마루 겸 욕실. 이 집이 사적인 공간임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보였다. 현관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니 탁 트인 조망이 있는 거실에 김 교수가 서 있었다. 그는 주방에 딸린 식탁으로 안내했다. 편안한 대화를 할 참이니 굳이 거창한 거실에 앉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김 교수는 유년 시절을 한옥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 뒤에는 부친이 설계해 목수가 지은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아파트 생활을 한 것은 대학원 2학년 무렵부터였다.

“꿈을 꾸면요, 그렇게 오래 살았지만 한 번도 아파트가 꿈에 나온 적이 없습니다. 무의식은 아파트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는 “이 집도 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은 지 2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사람에게 원형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에게 원형은 한옥이었다. ㄱ자형 한옥과 별채가 있었던 마당, 개집, 수돗가, 골목길…. 그는 현재 서울 경복궁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촌동에서 2005년까지 살다 아이들에게 다른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 이사했다. 아이들은 인근의 세종로, 내자동, 사직동 등에서 도시생활을 잘 즐기고 있다고 했다. 이우학교, 세계장신구박물관, 롯데부여리조트, 영동교회, 문학동네, 서울대 환경관, 양평주택, 정선군보건소 등으로 수많은 건축상을 받은 그는 철저한 모더니스트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유년의 기억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 생각과 작품, 나아가 행동방식까지 규정한다. 어쩌면 이 산골에 세컨드 하우스를 만들게 한 것도 유년의 기억, 그 원형이 아닐까?

■ 절실함으로 건축한 세컨드 하우스

김 교수는 10년 동안 이 집을 준비했다. 그에게 세컨드 하우스는 낭만보다는 절실함에서 비롯됐다. 건축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설계는 대개 혼자서, 고도로 집중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건축가가 일하는 사무실은 팀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혼자 집중하기 쉽지 않은 장소다. 밤 시간을 이용해 작업을 하던 그는 설계를 할 때 주로 용평콘도를 빌렸다. 1997년부터 시작된 콘도에서의 작업은 빈도가 잦아지자 피로도가 커졌고 급기야 세컨드 하우스를 찾기에 이른다. 2000년부터 시작한 땅 찾기가 결실을 맺은 건 2009년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의 땅을 샀다가 고민 끝에 팔고 다시 이 땅을 만난 것이다. 집은 2010년에 완공했으니 땅 찾기에서 집짓기까지 10년이 걸린 셈이다.

동네 주민들은 경사가 급한 땅이라 좋지 않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남서쪽으로 탁 트인 조망이 좋았고 무엇보다 양지바른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집이 들어선 위쪽 골짜기엔 네 가구밖에 없어 프라이버시도 확보되었다. 부지의 규모는 1300여㎡(400평)이지만 뒤로 산이 있어 훨씬 넓게 쓸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땅을 사는 것은 연애를 하거나 결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자신의 땅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민감합니다.”

하지만 김 교수는 “건축주가 비용을 지불하는 한이 있어도 땅을 구입할 때 건축가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땅을 구입할 때부터 건축 전문가가 개입한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설계를 한다는 것은 건물을 예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을 열심히 읽는 것이다. 땅과 건축주의 삶을 잘 읽으면 설계는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러기 위해 건축가는 겸손해져야 한다.

“건축주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잘 안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 집만 해도 건축주인 내가 뭘 원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완성한 집입니다. 지금도 집을 통해서 내가 뭘 원하는지를 배우고 있어요.”

김 교수는 “막상 설계를 진행해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말했다. 그렇다. ‘내가 꿈꾸는 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꿈꾸는 삶’이다.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진행하는 시민 건축 공부 모임에서 강조하는 것도 ‘내가 꿈꾸는 삶’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건축을 공부하는 모임에서 내가 꿈꾸는 집과 삶에 대한 글쓰기부터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 교수가 직면한 또 다른 어려움은 건축가로서의 자신과 건축주의 자신이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었다. 그는 건축가와 건축주를 선택하라면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 집을 지으며 건축주가 얼마나 힘든 역할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 작으면서도 넓은 공간

이 집의 면적은 39평이다. 건축사무소의 직원들과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찾아올 것을 고려한 넓이다. 이 안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공간은 11개나 된다. 2층 높이로 천장이 열린 거실, 한 평 반 크기의 침실, 욕실 겸 마루 등이 각각의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생겨났다. 이 작은 공간들은 역시 작으면서도 섬세하게 만들어진 계단, 가구, 디테일에 의해 실제보다 훨씬 커 보인다. 또한 각 공간들은 슬라이딩 도어, 한지 창문, 유리 프레임 등의 장치를 통해 열리거나 닫히며 변화하는 서로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맞은편 산을 조망할 수 있는 남서향의 거실에서 좁은 폭의 계단을 오르니 작업실이 나왔다. 설계에 컴퓨터를 쓰지 않는 그의 작업실 책상 위엔 트레이싱지와 필기구만 간결하게 놓여 있다. 망루를 닮은 서재에는 원경이 충분히 들어오고 있었다. 자주 쓰는 방도 폭이 2.2m밖에 되지 않았다. 좌식으로 만들어서 앉으면 후원 전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집 안에 담긴 11개의 서로 다른 공간들은 모두가 자신만의 외부 공간을 누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물품은 벽장 속에 수납해 전체적으로 집이 깔끔했다. 그는 공간을 특정 기능으로 규정하기보다는 비워둔 채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이를테면 주방에서는 음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며 담소하거나 휴식, 독서, 작업 공간으로도 쓸 수 있게 했다.

창문마다 처마를 설치해 변화무쌍한 기후에 대비하면서 계절에 맞게 햇살을 받아들이도록 한 점도 눈에 띄었다. 처마는 또한 내외부의 전이공간 역할을 하면서 공간의 깊이를 더했다. 잔디로 된 마당 한쪽에 네모반듯하게 구획된 텃밭도 주변 풍경과 재미있게 대비됐다. 조경은 조경 전문가와 협력하며 진행했다.

외장으로 쓰인 나무들은 지은 지 2년이 지난 터라 조금씩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나무의 느낌을 좋아했고 언젠가 회색빛 나무가 부분적으로 노출된 콘크리트색과 어우러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는 자연이나 건물 어느 곳에도 필요 이상의 상징이 부여되지 않았다.

■ ‘내가 꿈꾸는 집’은 계속된다

김 교수에게 이 공간은 작업실이자 집이다. 세컨드 하우스 못지않게 세컨드 오피스의 성격이 강하다.

“건축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마감날짜는 정해져 있는데 대충 끝내면 안되고, 남이 했던 것처럼 하면 안되고,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것처럼 하면 안되고….”

그는 “이 집이 겉보기엔 낭만적일지 모르지만 감옥도 이런 감옥이 없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집은 삶이 구체화한 공간이다. 개인의 공간이 지극히 사적인 삶을 담고 있더라도 그 공간은 언제나 그가 속한 시대와 그 시대 주택의 전형에 닿아 있다. 아파트가 대량으로 급조되고 골목마다 조잡한 집이 지어지던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지나며 그는 주택의 전형을 제안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이 시대 생활양식이 가진 보편성이 담긴, 전형으로서의 주택. 김 교수가 동료 건축가에 비해 유독 주택 건축을 많이 한 것도 주택의 전형을 실험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머물며 작업하는 이 집도, 앞으로 실험하기를 원하는 집들도 마찬가지다. 김 교수는 이 시대의 동의를 얻으면서도 세월의 힘을 견디는 전형을 창조할 수 있을까. 기대를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경향신문에서 ‘건축과 삶’ 시리즈의 일부로 진행된 ‘내가 꿈꾸는 집’의 여정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집’을 찾아가는 지면 밖 여정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 꿈들은 늘 건축으로, 집으로 형상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는 집짓기는 내가 꿈꾸는 삶 살기다.

▲ 세컨드 하우스, 윤선도의 보길도 집처럼 ‘문화’가 담겨야


세컨드 하우스는 오랫동안 별장으로 불렸던 집이다. 보통 사람들은 열망하면서도 한낱 꿈으로만 치부해온 부자의 상징이었다. 그러던 것이 근래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면서 일반인에게도 폭발적으로 확대되어가는 추세다. 이제 세컨드 하우스는 어떻게 될까?

세컨드 하우스에서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있다. 휴식을 위한 집일 수도 있고, 여가를 활용해 농사를 지으며 생태적인 삶을 실천하는 공간일 수도 있다. 도시의 집에서는 쉽지 않은 작업실로 활용할 수도 있고 비즈니스를 위한 사교 공간이 될 수도 있다.

현재 확대되는 세컨드 하우스의 전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옛 소련의 다차(dacha)다. 모스크바 근교의 다차는 대단위 아파트에서 협소한 생활이 불가피했던 도시민에게 소련 당국이 나눠준 농장이었다. 소련 시절부터 주5일 근무제가 확립된 데다 연간 두 달에 이르는 휴가로 여가가 많았던 시민들은 농사 등을 지으며 시간만 나면 다차에 매달렸다. 아예 그곳에 집을 지어 머물면서 낚시나 산책을 즐기는 사람도 늘어났다. 농장이 점차 주말주택으로, 휴가철 별장으로 바뀐 것이다. 휴식의 개념이 강조된 세컨드 하우스로 핀란드의 여름별장이 있다. 가족들이 모여 사우나를 하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즐기고 쉬는 공간이다.

이제 시작 단계라 할 수 있는 국내 세컨드 하우스는 아직 문화라 할 만한 것이 정착되지 않았다. 김 교수에 따르면 현재 우리의 세컨드 하우스에는 집만 있고 내용이 없다. 그러나 알고보면 우리의 세컨드 하우스도 유구한 전통을 자랑한다. 대표적인 것이 윤선도의 보길도 원림이다.

그는 1637년부터 1671년 죽을 때까지 일곱 번이나 이곳에 드나들며 글을 썼다. 세컨드 하우스가 ‘어부사시사’ 등 시가를 창작한 국문학의 산실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 벼슬을 한 대다수의 선비들에게 향리의 집은 세컨드 하우스 역할도 했다. 이런 집들은 선비들이 학문을 닦고 정신을 수양하는 공간이자 제자들을 길러내는 교육장이기도 했다.

세컨드 하우스 전통의 부활에서 핵심은 세컨드 하우스를 어떤 용도로 쓰느냐에 있다. 하기에 따라 세컨드 하우스는 새로운 문화가 꽃피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소비가 아닌 생산의 공간, 사치가 아닌 공동의 문화가 가능한 공간…. 김 교수는 “세컨드 하우스는 서울에 집중된 문화가 전국으로 퍼지는 주요 거점이 될 수 있다”며 “이를 위해 개인에게만 맡겨진 세컨드 하우스에 정부가 정책적인 지원을 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시리즈 끝>

정상철 | 대안연구공동체 건축학교 교장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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