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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땅이야기] 풍수지리주택 - 명당 터와 주택의 실 사례
도담채주택님 작성글 전체보기 추천 1 | 조회 737 | 2018.06.19 12:10 | 신고

풍수지리주택 - 명당 터와 주택의 실 사례

 

1. 인촌 김성수 선생의 생가

 

인촌 김성수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정치가로서 재물과 덕망, 정치가로서의 능력을 모두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재물과 관직을 모두 겸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촌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와 줄포리의 고택은 아직도 원형 그대로 보전되고 있는데, 두 곳 모두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인촌의 선대가 만석군이 된 줄포리 주택은 초가지붕이면서도 그 형태가 매우 특이하다. 일반적인 초가집은 지붕이 야트막한 데 비해, 이 집은 기운차게 높이 솟아 있다. 이러한 형태는 금산(金山)의 강체 형태이다.


인촌 생가가 있는 인촌리의 지세를 살펴보면 청룡과 백호가 가지런하게 뻗어 내려와 있는데, 용호는 순용에 해당되며 이러한 지세에서는 인자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루어진다.


또 주봉은 노적봉 형태를 이루고 있는 매봉이며, 인촌 생가는 이 매봉으로부터 북쪽을 향해 내려온 능선의 혈 위에 자리잡는 한편, 멀리 북쪽에 있는 바다를 향해 배치되어 있어서 배산임수의 원칙이 정확하게 적용되고 있다. 배산임수 원칙에 따라 배치된 집은 마당에 들어서면 내부 공간에서 밝은 기운이 발생되어, 북향 집이라고 해도 북향 집이라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 집이 그 대표적인 경우로, 북향 집에 대문 역시 북향이다.

이러한 집의 배치를 음양으로 분석하면, 마당 중심에서 봤을 때 건물은 남쪽에 있으므로 음의 기운을 갖게 되고, 대문은 북쪽에 있으므로 양의 기운이 들어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집 내부에는 음양의 기운이 조화를 이뤄 생기를 발생하게 된다.

또 오행으로 분석하면, 남쪽은 오행상 불(火)에 해당되고 대문은 북쪽이어서 물(水)에 해당되어 상극 관계를 이루지만, 주택과 대문이 모두 동사택 방위로 일치하고 음양이 조화를 이루므로 전체적으로 좋은 방위의 주택이다.

 

2.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안국동 주택

 

서울 종로구 안국동 8번지는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생가 터가 지척에 있는 등, 예로부터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다. 특히 조선 시대 맹사성 대감의 주택이 있어 예전에는 맹현골로 불리던 곳이기도 하다. 또 주변에 구 경기고등학교(현재 정독도서관), 덕성여자중고등학교, 중앙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창덕여자중고등학교 등이 즐비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교육의 중심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도 얼마 전까지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해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 김활란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박흥식 전 화신백화점 사장 등 사회 각계의 지도자들이 서로 이웃하며 살던 곳이다. 현재는 윤보선 전 대통령 유가족들만 이곳에 살고 있다.


서울시 민속사료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집은 대지 1,411평, 건평 250평으로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로 구분되어 있다. 이 집은 1800년경 당시 권력층에 있던 민(閔)모 대감이 자신의 주택으로 축조했는데, 당시 주택의 규모가 너무 커서 고종 황제의 눈총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개화론자인 박영효가 이 집에서 살았고(1861~1939), 윤보선 전 대통령의 선친 윤치소씨가 매입해 살기 시작했다.

윤 전 대통령은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의, 일명 새말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10세를 전후해 이곳으로 이사온 후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줄곧 이 집에서 살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이곳으로 돌아와 살고 있다.

이 집은 북한산의 큰 힘을 받은 말봉우리가 큰 용을 일으켜 남쪽, 즉 서울 시내를 향해 뻗어 내려가는데, 바로 생룡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강한 용은 강력한 추진력을 의미하며, 장룡은 오랫동안의 발복을 나타낸다. 윤 전 대통령이 정치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용의 생기에 힘을 입었다고 보여지며, 대통령직을 하야한 후에도 별 탈 없이 조용하게 지낸 것은 용의 강한 기운을 받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집 마당에 서면 백호인 북악산이 매우 가깝게 솟아 집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 북악산은 맹현골의 전반적인 지세에 있어서 주산인 동시에 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북악산은 그 형태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봉오리와 같고, 강체의 목산으로 문필봉(文筆峰)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문필봉 기운은 선비의 지조와 중심 사상을 갖게 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만들어 준다.

 

3. 이재형 전 국회의장 생가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 태어나고 성장한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343번지의 생가 일대는, 얼마 전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산과 나지막한 언덕, 실개천 등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전원 풍경이었다. 이 전 국회의장 집안이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약 330여 년 전이며, 이 전 국회의장이 태어나고 자란 집은 선친인 이규응 옹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이규응 옹은 이 집에서 5남4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는데,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 장남이며 2남 재준(전 대림산업 회장), 4남 재우(대림통산 회장), 5남 재연(금성사 사장) 등이다. 3남 철용씨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에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 집은 군포시를 비롯해 안양시, 안산시 등의 주산인 수리산의 맥이 동남쪽으로 연결되어 태을봉을 이루고 다시 그 맥이 집에 연결된다. 수리산의 태을봉은 모두 강한 형태의 목산이며, 중심이 잘 잡힌 문필봉을 이루고 있다.

이 집의 안산인 노적봉은 집을 향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처럼 노적봉이 안산으로 있는 지역에서는 큰 재벌이 배출되는데, 이 집안에서 몇 개의 기업 대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노적봉의 소응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집은 시골의 전형적인 남향 집으로서 안채 12평, 사랑채 13평 등 총 25평으로 되어 있는데, 농사에 필요한 창고 등의 면적을 제외한다면 그나마 주택 면적은 더욱더 줄어든다. 이렇듯 작은 공간에서 9남매가 모두 훌륭하게 자라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넓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집의 적정 면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4.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

 

호암 이병철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마을은 노적봉을 주산으로 하여,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강한 능선의 마지막 평탄한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담안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변 산들이 마치 담을 둘러친 것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산들은 모두 노적봉 형태를 띠고 있다.


호암 생가는 노적봉에서 내려온 내청룡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는데, 주산으로부터 장룡을 이루고 내려온 청룡은 이 집의 주룡이 되는 한편 집의 좌측 울타리와 같은 형태를 이룬다. 용의 길이는 발복 기간을 나타내므로 장룡에서는 발복 기간도 장기간이 된다. 호암 집안이 대를 이어 재벌이 된 것은 이러한 장룡의 기운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또 청룡이 수구를 막고 있는 지세로서 생기를 이룰 뿐만 아니라, 10리 밖에서 흐르는 남강은 호암 생가가 있는 쪽으로 역수를 이룸으로써 생기가 더욱 강하게 발생한다.

호암 생가는 전체적으로 남서향의 평탄한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전형적인 한옥으로 一자형 평면 형태이며,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런 대지에서는 정남향으로 배치하기 쉬운데, 호암 생가는 주룡의 맥과 건물 방위를 일치시키는 배산임수 원칙을 정확하게 따른 것이다.

 

5. 강릉 선교장(船橋莊)

 

강원도 강릉시 경포대 옆에 있는 선교장은 한국의 전통적인 민가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명당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흔히 ‘10년 가는 권력 없고 3대 가는 부자 없다’고들 하는데, 이 선교장은 이 말을 무색케 한다. 무려 9대에 걸쳐 만석꾼 집안으로 전해 내려오는가 하면 강릉 시장, 고려대·관동대·건국대 등 학계 교수와 출판사 열화당 대표 등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선교장에서 처음 만석꾼을 이룬 것은 지금부터 9대 위인 이내번(李乃燔)씨 때부터이다. 원래 충주에서 살던 이씨 집안이 강릉으로 와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경포대 바로 옆쪽이었다.

점차 가산이 늘어나자 좀더 넓은 터를 찾아 나섰는데, 어느 날 족제비들이 집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족제비 수는 점차 늘어나 어느 날 한 떼를 이뤄 서서히 서북쪽으로 이동했다.


이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이씨는 족제비떼를 따라 갔는데, 약 1킬로미터쯤 가서 울창한 송림에 이르자 그 많던 족제비들이 모두 흩어져 보이지 않았다. 이내번씨는 멍하니 그곳에 서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의 지세를 살펴보고는,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명당이라고 생각하고 집터를 이곳으로 잡았다. 이곳으로 이주한 후 이씨는 해마다 풍작을 거두었는데, 수확한 벼를 쌓아 놓으면 커다른 산과 같을 정도였다. 이후 그는 강릉 일대는 물론 타지역까지 이르는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문진 이북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주문진에, 묵호 이남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묵호에 각각 별도의 창고를 두고 관리할 정도로 큰 부자가 되었다.

이씨는 이곳에 이사하도록 집터를 알려 준 족제비에게 감사하며 매년 족제비 먹이를 뒷산에 갖다 놓았는데, 그 풍습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교장 지세는 대부분의 명당이 그러하듯 야트막한 산이 감싸고 있는데, 대관령에서부터 뻗어 내린 생룡이 시루봉을 지나 경포대 앞까지 내려와 이곳 선교장에서 혈을 이루고 있다.

선교장 마당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이 4면을 병풍과 같이 둘러싸고 있어 매우 아늑하게 느껴지는데, 그 아늑함은 정도를 지나쳐 답답해 보일 정도이다. 이처럼 주산과 청룡, 백호 등이 매우 가깝게 감싸고 있는 명당은 금시발복하는 특징이 있다. 이내번씨가 이곳으로 이사하자마자 재산이 크게 늘어난 것도 금시발복하는 지세의 효과를 본 것이다.

선교장 전면에는 경포대가 매우 가깝게 자리잡고 있지만 청룡과 백호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고, 강릉 앞바다는 더욱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재산이 모이는 명당에서는 바다나 강물과 같은 큰 물이 직접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선교장은 안채, 행랑채 등 총 99칸의 전형적인 조선 시대 민가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내부 마당이 정사각형이다.

 

6. 이화장

 

서울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살던 곳이며, 이전에는 인평대군이 살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46년 1월부터 1948년 8월 경무대로 옮기기 전까지의 2년 7개월과, 1960년 4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하와이로 망명하기 직전의 1개월 동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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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1,820평의 이화장의 본건물은 ㄷ자 형태의 한옥이며, 부속 건물은 5평 남짓한 조각당(대한민국 초대 각료들을 선정한 곳)과 유족들이 생활하는 건물 등 총 세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는 70여 평의 본채에는 이 대통령 내외가 쓰던 침실·거실·서재·응접실 등 6개의 방과 주방·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이화장은 낙산의 주봉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어 내린 용 위에 자리잡고 있다. 낙산은 산세가 힘차고 단정하며, 서울의 명당수인 청계천이 역수가 되도록 하여 생기를 이루게 한다.

이화장에서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서는 서울 남산이 청룡이며, 북악산이 백호, 인왕산이 안산으로서 사신사가 고루 갖추어진 지세를 이루고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산은 문필봉 형태를 이루고 있는 북악산인데, 북악산은 백호이면서 안산과 같은 역할을 하여 이화장을 향해 마주 보고 있음으로써 명당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화장의 주택 평면은 터만큼 명당 구조를 이루지는 못한다. 이화장은 남쪽을 향해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ㄷ자 평면 형태는 중심력이 부족하다. 주택의 기운은 중심에 강력한 공간이 있어야 생기가 발생하는데, 지붕도 생기가 부족한 형태이다. 특히 낙산의 용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지세로 보면 서향으로 배치하는 것이 배산임수의 이론에 합당한데도 남향으로 배치, 생기를 저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세는 명당이지만, 건물 형태나 배치 방법은 여러 가지로 부족함이 많았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서 거주하는 동안 재물이 모이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친 혈육을 보지 못했으며, 말년을 외국에서 어렵게 보내게 되는 데 집 형태 등 주택의 풍수가 적잖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7. 경교장과 이기붕의 집

 

김구 선생이 살았고, 결국 암살당한 경교장(종로구 평동 108번지)은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대문 사거리로 통하는 야트막한 언덕의 큰 길 중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경교장은 인왕산 줄기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인왕산은 서울의 백호로서 서울을 서쪽에서 감싸고 있다. 그러나 경교장 위치는 용의 중심선 밖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백호의 후면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풍수로 보아 능선 안쪽은 산의 전면으로서 생기가 모이고, 백호의 좋은 기운을 받는다. 그러나 백호 후면은 생기를 전혀 받을 수 없는 곳이다. 경교장에서 역사적으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용의 밖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이 살던 집은 김구 선생이 살해당한 경교장 바로 우측에 있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 부정 선거 책임자로 여론의 화살을 받았던 그는 결국 자신의 아들인 이강석의 손에 죽고 말았는데, 그 집은 철거되고 이후 4·19도서관이 건립, 이용되어 왔다.

이 집은 경교장 서쪽 담 바로 옆에 있어서 인왕산 능선을 완전히 벗어난 곳으로서, 백호 후면에 자리잡고 있다. 백호 전면은 명당이지만, 백호 후면은 흉지이다.

 

8. 다산 정약용 생가

 

다산 정약용 선생은 한강의 큰 물줄기가 잔잔하게 흘러나가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행정 구역상 경기도 와부면 능내리에 속하는 다산 선생의 생가 일대에는 다산 선생이 생전에 터를 잡았다는 자신의 묘소를 비롯해, 만년에 독서와 저술 등의 공간으로 사용했던 사랑채가 복원돼 있다.

다산은 1762년 6월 16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압해(나주의 옛 이름)이고, 호는 다산과 사암 등이며 세례명은 요한이다. 원래 8대에 걸쳐 높은 벼슬을 지낸 양반 집안이었으나, 그의 고조 때에 이르러서는 모든 관직을 멀리하고 오직 생업과 학문만을 탐구하며 선비 정신으로 가문을 이어 왔다.

다산 선생이 태어난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살던 집터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현재의 생가는 당시의 형태를 어느 정도 이전하여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생가 터의 지세는 예전과 변함없다.


다산 정약용의 생가는 한강에 매우 가깝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의 주산은 천마산 한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의 큰 물줄기 앞 능내리에서 멈추면서 이루어 놓은 혈이다.

일반적으로 큰 강물이 가까이에 있는 지세에서는 혈이 생기지 못한다. 큰 강물은 강한 음의 기운을 갖고 있어 양의 기운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또 강물이 있는 지역에서 중요한 점은 수구인데, 수구가 좁으면 혈이 이루어지는 반면 수구가 넓으면 혈이 이루어질 수 없다. 수구가 좁게 되려면 청룡이나 백호가 역수해야 한다. 이곳 지세에서는 다행히도 백호가 역수를 하고 있어서 넓은 한강 기운을 부분적이나마 모아 주고 있다. 따라서 다산 생가의 지세는 백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오행에서 물과 불은 반대의 성질을 갖고 있다. 오상(五常)으로 물은 지식이며, 불은 예절을 나타낸다. 예절이 지나치면 허례가 되는데, 다산 철학의 특징은 그 당시 사회에 만연된 허례와 허식을 타파하고 실질적·현실적인 생산을 원칙으로 하는 실용주의에 있다. 이러한 실용주의 철학은 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역》에서 물은 험한 기운을 나타낸다. 다산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결혼한 후에는 여러 자식을 잃었으며, 형제 중에는 천주교도로 처형된 자도 있었다. 다산 자신도 오랜 유배 생활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험난한 인생은 곧 생가 앞에 흐르는 큰 물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9. 세계적인 건축물과 풍수지리

 

근세기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로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씨를 가장 먼저 꼽는다. 라이트 씨는 1869년 미국 위스콘신 주 리칠랜드에서 태어났는데, 1959년 89세로 사망할 때까지 일생 동안 건축 설계에만 전념했다.

그의 건축사상은 동양적 형태가 가미된 유기적 공간 창조였다. 그는 일본의 제국호텔 등 유명한 작품을 설계했으며, 일생 동안 390개의 작품을 남겼다. 이 중 350개는 주택 설계여서 그는 세계적인 주택 설계자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주택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펜실베이니아 주 베어린에 있는 카프만 씨의 주택 ‘낙수장(Water Fall)’을 들 수 있다. 1936년, 그의 나이 67세에 설계한 이 주택은 그때까지만 해도 무명인 그를 일약 세계적인 대가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건축가들은 수평과 수직적 구조를 강조하여 도약하는 역동성을 나타낸 낙수장 형태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으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주택 작품으로 꼽고 있다.

낙수장은 계곡 사이의 강물 중간, 경사진 대지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집의 특징 중 하나는 거실 아래로 강물이 흐르고, 앞뒤 중간 중간에 폭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집 아래로 흐르는 급한 물결과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 소리가 항상 집 안에 가득 찬다.


이 집은 비록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집이라고 해도, 풍수로 볼 때는 흉가에 속한다. 집은 강에서 멀리 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흐르는 강 위에 세워져 있다. 강물이 급하게 흐르는 곳에서는 바람도 강하게 불어 생기를 빼앗아 가며, 그곳에 사는 사람의 건강을 해친다.

실제로 이곳이 완공된 후에 입주한 주인은 이 집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밤마다 거실 바닥을 통해 들리는 물 소리와 바람 소리가 마치 귀신 울음 소리와 같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이 집은 기념관 등으로만 사용되고 있는데, 아무리 아름다운 집이라고 해도 사람이 살도록 풍수에 맞춰 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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