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30일자로 다음 부동산 서비스가 종료됩니다.
그동안 서비스를 이용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종료 관련 자세한 사항은 아래 공지사항 자세히 보기를 통해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다음 부동산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지사항 자세히 보기 오늘 하루 보지 않기
‘철물점’ 주인 손닿은 달동네 달 떴네 ㆍ철물 디자이너 최홍규와 이화동 성곽마을 최홍규 관장이 운영하는 박물관, 갤러리, 카페 등이 모여있는 이화동 골목의 모습. 60여년의 세월을 짊어진 채 해체될 날만 기다리던 동네가 다시 살아났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 성곽마을. 2층짜리 구식 연립주택 140여채가 모여있는 곳이다. 고즈넉한 서울성곽이 둘러싼 동네는 첫발을 들이는 순간 별천지처럼 느껴진다. 지하철 혜화역에서 내려 벽화마을이란 표지판을 따라 경사진 길을 20분쯤 올라가면 낙산공원과 벽화마을이 나온다. 천사 날개가 그려진 벽과 꽃 계단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이화동 성곽마을이다. 성벽과 나란히 난 골목을 사이에 두고 카페, 박물관, 공방, 식당, 기념품 가게가 양쪽으로 모여 있다. 한국 관광안내서에 소개된 모양인지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다. 서울의 옛 모습이 남아 있으면서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사진 찍을 장소도 많은 곳. 그동안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숨은 보물이다. 쇠락한 동네를 바꿔놓은 사람은 철물디자이너 최홍규씨(59·쇳대박물관장)다. 강하지만 불에 달구면 유연하게 모양이 바뀌는 쇠를 닮은 이다. 작업복 차림인 그는 가파른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내린다. 이 동네에서 5년간 주민들과 부대끼는 사이에 뭐든 말끔히 고치는 맥가이버로 통하게 됐다. 그는 성곽마을의 폐가에 가까운 집 6채를 사들여 ‘이화마을박물관’ ‘최가철물점’ ‘개뿔’ 등의 박물관, 공방, 카페로 바꿔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예술가와 주민들에게 공방과 박물관, 가게를 열게 했다. 마을 전체가 오랜 역사를 간직한 박물관으로 바뀌면서 재개발지구 해제도 눈앞에 두고 있다. 이화동과 그의 인연은 길게는 쇳대박물관, 짧게는 벽화마을에서 비롯됐다. 그는 강남에서 잘 나가는 ‘최가철물점’ 대표였다. 1970년대 중반 을지로 순평금속에 들어가 십수년 철물 일을 배운 뒤 1988년 독립해 회사를 차렸고, 예술의전당 전화부스와 휴지통을 만들면서 디자인 감각을 인정받았다. 강남 개발붐을 타고 사업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인사동, 황학동을 뒤지면서 옛 철물을 모았다. 국내 최고의 철물디자이너이자 철물수집가가 됐다. 회사는 강남, 공장은 성수동에 있었지만 2003년 대학로 동숭동에 5000여점의 세계 자물쇠를 전시하는 쇳대박물관을 세웠다. 갤러리이면서 회의와 파티가 열리는 공간인 ‘노박’에 전시된 각종 수집품들. 그런 그가 이화동에 눈을 뜬 것은 2006년 벽화마을 조성사업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철물디자인을 맡아 벤치를 만들던 그는 달동네의 가치에 눈을 떴다. 작은 집과 좁은 골목, 오랫동안 살아온 이웃, 전선과 빨랫줄 사이로 보이는 도시 풍경.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세련된 새것들 천지인 강남에서는 느끼지 못한 푸근함이었다. 2011년 낙산 경사를 따라 지어진 영단(營團)주택 가운데 아래쪽 집 한 채를 샀다. 좀 더 위로 올라가 봤다. 집과 동네의 원형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곳을 살리는 실험에 도전했다. 이화동 영단주택의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낙산 아래 동네에는 일제시대에도 서민들이 살았지만, 본격적인 개발은 해방 이후 환국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화장에 거처를 정하면서 시작됐다. 대통령 사저 주변을 재정비하기 위해 대한주택영단(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이 1954년부터 총 147채의 영단주택을 건립했다. 1층은 시멘트 블록, 2층은 목조로 지어 일본식 기와를 얹은 13평짜리 연립주택이었다. 2층에는 작은 테라스도 있어 요즘 각광받는 테라스하우스와 비슷한 모습이다. 대장간 박물관 ‘풀무아치’는 신문지로 도배된 벽까지 원형을 그대로 보존했다. 건립 당시에는 상류층이 선호하는 최고의 주택지였으나 서울이 커지고 강남 아파트가 새로운 주택으로 각광받으면서 이 동네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으로 남았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는 지대가 높아 집값이 싼 이곳에 가내 봉제공장들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동대문 의류시장이 발전하면서 동대문 시장 주변인 창신동과 이화동은 의류 제조기지가 됐다. 그마저 1990년대 시작된 제조업 자동화와 중국 제조업 성장세에 밀려 점차 줄었다. 남은 공장들은 창신동으로 옮겨갔다. 2000년대 들어 문화지구로 지정되고 예술가들이 마을 계단과 건물 벽에 그림을 그리면서 이화동은 벽화마을로 불리기 시작했다. 유명세를 치르고 관광객이 많이 찾아왔으나 주민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외지인이 몰려와 동네가 시끄럽고 지저분해지자 벽화를 훼손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서울시는 2008년 이곳을 주택재개발정비사업지구로 지정했다. 그러나 낙산성곽을 가린다는 이유로 5층 이상 건축물을 지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아무도 재개발에 나서지 않았다. 몇몇 집은 투기꾼들 차지가 됐지만, 대개 주민들은 싼 집값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어려워 그저 세월을 기다렸다. 최 관장은 처음에 경사진 영단주택 단지의 아래쪽 집을 한 채 사서 ‘수작’이란 이름의 봉제 박물관으로 꾸몄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개발될 때까지 몇 년간 동네를 즐기자”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원형이 보존된 집을 발견했다. 지금 ‘개뿔’이란 이름으로 와인 따개를 전시하면서 카페를 겸하는 곳이다. 성곽마을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는 이 집 1층에는 방과 부엌으로 쓰던 3칸의 ㄱ자 공간과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 문을 여니 벽이 돌담이다. 낙산성곽을 따라 도로를 내면서 쌓은 담에다 집을 붙여 지은 흔적이다. 실내 나무계단을 통해 2층으로 가면 다시 방이 나온다. 영단주택은 아래 윗집의 벽이 붙은 합벽방식으로 지어졌다. 1층보다 2층의 단면적이 좁아 1층 경사진 지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주민들이 공간을 넓히려 개축하는 과정에서 집 모양이 뭉툭해지는가 하면, 도로 개통으로 집이 잘려나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집은 낡았지만 원형은 많이 남아있다. 최 관장은 ‘수작’을 처분한 뒤 ‘개뿔’이 된 집을 시작으로 꼭대기 골목의 폐가를 하나씩 사들이기 시작했다. 골목 초입에 ‘최가철물점’이 있다. 성수동에서 이화동으로 옮겨온 공장에서는 7명의 직원들이 각종 철물을 만든다. 철물점과 연결된 박물관인 ‘지붕 위의 장닭’은 전통 대장간에서 쓰던 용구를 전시하고 있다. 그 옆이 ‘이화마을박물관’이다. 파란 벽에 하얀 배꽃이 그려진 이 집은 이화동 역사가 담긴 주민들의 기증 물품과 자료를 전시해오다 서울시가 맞은편 빈집을 사들여 내줌으로써 박물관은 이사하고 민박으로 용도 변경을 꾀하고 있다. 박물관 옆에는 주민들이 함께 가꾸는 마을텃밭이 있다. 텃밭은 마을박물관과 더불어 주민 협력의 상징이다. 텃밭을 지나자 식당 및 부엌박물관으로 꾸민 ‘배오개’가 나온다. 개방된 부엌이 있고 테이블 사이와 벽에는 철물로 된 주방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그 옆 건물은 ‘노박’이다. 다른 집보다 면적이 넓은 이곳은 회의나 파티가 가능한 갤러리로 쓰인다. 그리고 마지막 집이 ‘개뿔’이다. 한편 ‘최가철물점’ 맞은편 ‘풀무아치’는 ‘지붕 위의 장닭’보다 규모가 큰 대장간 박물관으로 용도가 정해졌다. 다른 건물들이 수리과정에서 너무 많이 원형을 잃어버린 것이 안타까워 이 집은 문과 창문, 벽까지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바닥과 보강공사만 했다. 벽에 아무렇게나 붙인 옛날 신문지가 정겹다. 마을 전체가 박물관인 이곳에는 최 관장이 고친 집들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공간이 자리 잡았다. 자동차와 인형이 전시된 개미 레스토랑, 낙산 아트스페이스와 소석 갤러리, 보자기 공방인 원류헌, 가죽과 퀼트 작업장인 손놀림, 칠보공예 공방인 갤러리 그미, 동네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진자료가 전시된 목인헌 등이 있다. 1년마다 한번 열리는 이화동 마을박물관 전시회가 3회를 지났다. 이밖에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빵집, 카페들이 골목 풍경을 다채롭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2011년부터 5년간 이뤄진 일이다. 10년을 내다본 이화동 마을박물관 프로젝트는 이제 하드웨어를 갖추는 1단계를 지나 소프트웨어를 보강하는 2단계로 들어선다. 동네가 달라지면서 집값이 올랐다. 5년 전 3.3㎡(1평)당 1000만원이던 것이 2000만원으로 뛰었다고 한다. 발전가능성을 보고 집을 사려는 사람도 늘었다. 원주민의 15%가 그사이 집을 팔고 떠났다. 그러나 젠트리피케이션, 동네가 좋아지면서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주민들이 떠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워낙 작은 집들이어서 세입자 없이 주인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값이 올라 이익 본 사람은 있어도 손해 본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현재 이화동에는 주민협의회가 만들어져 동네 살리는 일을 논의하고 실천한다. 주민협의회의 역할, 주거와 비주거 공간에 대해 논의한 데 이어 집수리 지원제도, 건축물 가이드 라인, 리모델링 활성화 구역 지정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50여명의 주민이 참여하는 협의회에서 최 관장의 직책은 마스터 플래너다. 그의 계획은 동네 외양만 깔끔하고 예쁘게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도로변 상업시설을 운영할 수 없는 주거지역 주민들도 변화의 수혜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교육, 공방, 민박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쇠를 다루던 장인인 그가 어떻게 동네를 만드는 장인이 됐을까. 그는 ‘박물관인’으로서의 사명을 든다. 철물을 만들다 보니 더 공부하고 싶어서 철물을 모으게 됐고, 옛것의 가치에 눈뜨다 보니 이화동이 보석처럼 보이더란다. 최가철물점이 인생 1막이었다면 쇳대박물관은 인생 2막, 이화동 마을박물관은 인생 3막이다. 지난 5년간의 3막 1장은 보람과 애환이 교차한 무대였다. 꿈이 현실이 되는 건 꿈꾸는 것처럼 쉽지 않다. 때때로 실의도 경험한 최 관장은 “나와의 싸움에서만 이기면 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꾸민 6개 공간을 묶어 1만원짜리 패키지 관람권을 만들었다. 이화동 마을박물관이 떠난 집은 민박으로 변모한다. 레스토랑과 카페도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손님을 맞는다. 고생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투자한 돈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사업가”라고 했다. 한 사업가이자 박물관인, 동네 사람의 꿈은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결실을 맺을까. 600년 지난 서울성곽과 60년 지난 옛집들이 새로운 실험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1957년 경기 고양군의 최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을지로 순평금속에서 철물 일을 배운 뒤 1988년 강남금속을 설립했다가 최가철물점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3년 쇳대박물관을 세웠으며 2011년부터 이화동 마을박물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대장간 전’을 여는 등 국내 최고의 철물디자이너로 꼽힌다. 출처 경향신문 글 한윤정 선임기자 ·사진 박기호 사진가 농가주택,시골집 수리하기,전원주택 .통나무, 목조,주말 주택.컨테이너,이동식주택.세컨드 하우스.황토주택 귀농,귀촌 ,강원도 ,횡성 부동산의 모든것이 산골 전원주택 이야기에 다 있습니다 한번의 추천 과 칭찬은 글 쓴 저희를 춤추게 한답니다. 산골 생활 20년의 노하우가 아래에 다 있습니다. 더 많고 다양한 정보를 보시려면 아래 영문 카페주소를 클릭하세요.
|
Daum부동산은 제휴 부동산정보업체가 제공하는 매물 정보와 기타 부동산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로서,
제휴 업체의 매물 정보를 비롯한 각종 정보 및 이와 관련한 거래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부담하지 않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사 또는
글쓴이에 있으며, Kakao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